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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의 이혼, 영국과 로마 가톨릭의 결별로 이어져

헨리 8세의 이혼, 영국과 로마 가톨릭의 결별로 이어져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장면] (40) 엠마뉴엘 로이체의 ‘중대한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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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8 발행 [1609호]
▲ 엠마뉴엘 로이체, ‘중대한 문제’(1846), 스미스소니언 미술관, 미국 워싱턴 D.C.



1517~1521년, 마르틴 루터와 가톨릭교회 간 결별의 여파는 유럽에 여러 가지 형태로 영향을 미쳤다. 가톨릭교회가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의 후유증을 직접, 극적으로 경험한 것은 1527년 ‘로마 약탈’을 통해서였다. 클레멘스 7세 교황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사망할 때까지 매사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눈치를 살폈다. 그다음은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의 탄생에 영향을 미쳤다.

로마가 약탈을 당하던 바로 그해,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8세(재위 1509~1547)는 아라곤의 캐서린(1485~1536)과 20년의 결혼 생활을 청산하겠다며 ‘혼인 무효’를 교황청에 요청했다. 교황으로선 여간 당혹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헨리 8세는 헨리 7세의 둘째 아들로서, 형 아서 투더가 일찍 죽는 바람에 형수며 왕비였던 캐서린과 결혼할 때 여간 힘들지 않았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결혼을 승인하기까지, 캐서린은 아서 튜더와 초야를 치르지 않았다고 맹세했고, 교황을 둘러싼 그리스도교 제후 국가의 국왕들이 한마음으로 요구하고 있었다. 그것은 캐서린이 스페인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의 막내딸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이모였기 때문에, 스페인과 영국, 신성로마제국 간의 명예와 동맹의 성격이 컸다. 1509년 율리오 2세 교황의 관면혼 승인에 따라 18살의 헨리 8세와 여섯 살 많은 캐서린은 결혼에 성공했다. 1509년 6월 11일에 결혼하고, 6월 24일에 영국 국왕으로 즉위식을 거행했다.

초기에 두 사람은 서로 깊이 사랑했고 금슬도 좋았다. 그러나 1516년 캐서린이 메리 공주를 낳은 뒤, 몇 차례 유산을 거듭하다가 폐경기를 맞자 헨리 8세는 왕위를 계승할 아들을 얻지 못해 안절부절못했고, 부부 사이도 틀어지기 시작했다. 헨리 8세는 아버지 헨리 7세가 왕위쟁탈전(장미전쟁)에 성공하여 왕위에 올랐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이 튜더 왕조의 두 번째 왕이었기 때문에, 적자를 통해 왕위를 계승시켜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결혼한 지 18년이 지나도록 아들은 보지 못했고, 좌절감은 캐서린의 젊은 시녀 앤 불린(Anne Boleyn, 1501~1536)에게로 눈을 돌리게 했다.



헨리, 캐서린과의 혼인 무효 소송 진행했지만


헨리 8세는 앤 불린에게 애정 공세를 펼쳤고, 앤은 정부(情婦)가 되기 싫다며 헨리의 유혹을 매몰차게 거부했다. 그녀가 거부하면 할수록 헨리의 유혹은 집요해졌고, 결국 헨리는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과 혼인하기로 했다. 그래야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날 아들을 상속자로 삼을 수 있기도 했다.

헨리는 캐서린과의 혼인을 무효로 만들기 위해 몇 가지를 주장했다. 캐서린은 아서와의 결혼에서 이미 순결을 잃었고, 헨리는 형수와 부당하게 결혼했으므로 과거 율리오 2세 교황의 관면혼은 효력이 없다는 것, 그동안 아들이 없었던 것은 그 결혼이 하느님이 보시기에도 적법하지 못해 벌을 내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혼인이 무효가 되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결혼도 허락해 달라고 했다.

헨리의 특사로는 윌리엄 나이트가 파견되었다. 1527년 5월, 로마 약탈로 꼼짝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교황을 그렇게 만든 카를 5세까지 나서서 헨리와 캐서린 왕비 간 이혼을 막아 달라고 압박했다. 당시 카를 5세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교황까지 갈아치울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한 인물이었다. 교황은 자신의 코가 석 자인 데다 이혼을 허락하지 말라고 계속 협박과 으름장을 놓는 황제의 뜻을 ‘감히’ 거역할 수가 없었다.

이듬해에도 헨리는 다시 특사를 보내 ‘혼인 무효’를 요청했으나 교황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1528년 9월 29일, 이번에는 로렌초 캄페지오 추기경이 교황의 특사로 런던에 도착했다. 혼인 무효 소송을 위해 설치한 특별 법원의 판사로 온 것이다. 법정에서 최고 쟁점은 헨리와 캐서린의 혼인을 위해 과거 율리오 2세 교황이 내린 관면의 유효성에 관한 것이었다. 캐서린은 캄페지오 추기경에게 율리오 2세의 관면장을 보여주며 결혼의 합법성을 주장했고, 그에 따른 공방이 오갔다. 1529년 7월 23일 캄페지오 추기경은 소송을 무기한 연기한다고 선언하고 로마로 돌아갔다.

혼인 무효 소송을 계속 진행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헨리 8세의 측근들은 교황의 의견 따위는 그냥 무시해버리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1530년, 잉글랜드 의회는 캔터베리 대주교와 성직자, 법률가들이 나서서 교황의 명령에 복종을 다짐하자 그것을 따르기로 결의했고, 존 피셔 주교도 의회 발언에서 교황의 권위를 강력하게 옹호했다.



종교개혁, 영국 국교회 탄생

이런 속에서 헨리는 국왕이라는 신분을 잊은 듯, 독단적으로 앤과 혼인해 버렸다. 그런데 그 시기에 캔터베리 대주교로 교황의 신망을 얻던 윌리엄 워햄 대주교가 사망했고, 갑작스레 그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 헨리는 클레멘스 7세 교황에게 볼린 가문과 친분이 있는 토머스 크랜머 신부를 새 대주교로 추천했고, 아무것도 모르는 클레멘스 7세는 이를 받아들였다. 헨리와의 관계 개선을 기대하고 그의 추천을 받아준 교황의 이 결정은 교황의 뜻과는 반대로 헨리와 앤의 결혼을 합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토머스 크랜머는 헨리의 요청을 받아들여 캐서린과의 혼인 무효를 선언했고, 1533년 6월 앤은 웨스트민스터대성당에서 잉글랜드의 새 왕비로 대관식을 가졌다. 그리고 석 달 후에 엘리자베스 공주를 낳았다. 교황은 헨리와 토머스 크랜머를 함께 파문했다. 그러자 헨리는 1534년 영국 의회에서 자신이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임을 선포하고,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분리하는 종교개혁을 단행했다.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가 탄생한 것이다.



역사적인 주제에 몰입한 화가

소개하는 작품은 엠마뉴엘 고틀립 로이체(Emanuel Gottlieb Leutze, 1816~1868)가 1846년에 그린 ‘중대한 문제(The Great Matter)’라는 작품이다. 워싱턴 D.C. 스미스소니언 미술관에 있다. 작가는 ‘델라웨어 강을 건너는 워싱턴’(1851,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으로 널리 알려진 화가다. 독일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사망했다.

25세에 재능있는 화가로 명성을 떨쳤고, 초상화를 팔아서 번 돈으로 뒤셀도르프 미술학교에 다녔다. 역사적인 주제에 몰두하여 독일에 있을 때부터, 특히 미국 역사에 기초한 연작을 많이 그렸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관련한 연작은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정확한 소묘와 섬세한 세부 묘사를 중시하는 뒤셀도르프 학파의 양식을 그대로 따르며 역사적인 사건에 감정을 더 했다.

로이체는 1859년 미국으로 이주했고, 이듬해인 1860년 미국 의회는 그에게 국회의사당의 계단 장식을 의뢰했다. ‘제국은 서쪽으로 나아간다’라는 대작을 그려, 서부 개척의 역사를 묘사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작품을 다량 소장하고 있는 뉴욕 ‘국립 디자인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다. 워싱턴에서 52세의 나이로 열병에 걸려 사망했다.



영국, 여왕의 시대로

캐서린과 앤, 두 차례의 결혼에도 불구하고 헨리 8세는 아들을 얻지 못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앤의 시녀, 제인 시모어에게 눈길을 돌렸다. 앤이 남편 헨리로부터 간음죄로 사형 선고를 받고 사형(1536)당한 지 11일 만에 헨리와 제인 시모어는 결혼했다. 제인은 헨리가 고대하던 아들 에드워드 6세를 낳았고, 출산 후 12일 만에 산욕열로 사망했다. 이후에도 헨리는 3명의 아내를 더 얻어 영국 역사상 가장 많은 6명의 아내를 두었던 왕이지만 아들은 제인이 낳은 병약한 에드워드 6세밖에 얻지 못했다. 그마저 왕위에 오른 지 6년 만인 16살에 병사해 캐서린의 딸 메리 1세와 앤의 딸 엘리자베스 1세가 헨리 8세의 뒤를 계승하며 여왕의 시대를 맞이했다. 그 과정에서 영국은 가톨릭교회로부터 완전히 멀어졌다.



그림 속으로


작품 속 배경은 1525~1530년대 헨리의 궁정이다. 법정에 나온 헨리와 왕비 캐서린, 시녀 앤이 주변 인물들과 함께 있다. 오른쪽 가운데 검은 베일을 쓰고 서 있는 캐서린에게 기사들과 추기경들, 그 뒤의 많은 사람이 왕비로 예를 올리고 있다. 반면, 그 뒤에서 헨리는 젊은 시녀 앤에게 애정 공세를 하고 있다. 왼쪽 끝, 스페인 대사는 왕의 공개적인 배신과 외도를 목격하며 혐오스러운 표정을 짓고, 다른 주변 인물들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쑥덕이고 있다. 모든 사람의 이목이 두 사람을 향해 있다. 화가 로이체는 독일에서건 미국에서건 혁명을 지지했던 사람으로, 왕족에 대한 그의 시선을 엿볼 수가 있다.



엠마뉴엘 로이체, ‘중대한 문제’(1846), 스미스소니언 미술관, 워싱턴 D.C.




김혜경(세레나,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이탈리아 피렌체 거주)

▲ 김혜경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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