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진신부의 교회이야기

제48강 교회와 나눔

재생 시간 : 47:08|2010-08-12|VIEW : 23,001

우리나라 사람의 뛰어난 머리는 세계적이다. 문제는 좋은 머리를 어떻게 쓸 것인가다. 우리가 어릴 때 부모님들 입에 달린 말이, '공부해라, 공부! 배워서 남 주나, 다 너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지!' 미국이나 유럽에서 존경받는 사람은 배워서 남 줄 줄 아는 사람이다. 배워서 남 줄 줄 아는 사람이 받는 큰상이 노벨상이다. 평생 남을 위해 사신 마더데...

우리나라 사람의 뛰어난 머리는 세계적이다. 문제는 좋은 머리를 어떻게 쓸 것인가다. 우리가 어릴 때 부모님들 입에 달린 말이, '공부해라, 공부! 배워서 남 주나, 다 너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지!' 미국이나 유럽에서 존경받는 사람은 배워서 남 줄 줄 아는 사람이다. 배워서 남 줄 줄 아는 사람이 받는 큰상이 노벨상이다. 평생 남을 위해 사신 마더데레사 수녀도 노벨상을 받았다.

독일에는 '자원봉사의식'이 두루 퍼져있다. 경제적 시간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은 흔히 사회복지 시설에서 자원봉사를 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도 종종 고아원이나 양로원에서 파트타임으로 봉사한다. 사회전체가 건강할 수밖에 없다.

미국에는 '기부금의식'이 두루 퍼져 있다. 철강으로 큰 돈을 번 카네기는 만년에 전 재산을 사회를 위해 다 내놓았다. 그 뒤로 석유왕 록펠러, 자동차왕 포드가 뒤를 이었다.

2008년 미국 경제잡지 '포트폴리오' 발표에 따르면 현재 미국 기부자 1위가 워런 버핏회장으로 461억 달러(55조), 빌게이츠 회장이 137억 달러(15조)로 2위였다.

머리 좋은 사람은 공부해서 남을 위해 또 나라를 위하면 좋겠다.

요즈음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식도 많이 바뀌고 있다. 시간적인 여유를 가진 사람들이 봉사의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 홍수가 났을 때, 지하철 참사 때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사회복지시설에 파트타임으로 봉사하는 자원봉사자들이 많다.

남을 돕는 다는 것이 정신적으로 얼마나 건강한 것인지... '남을 위한 삶, 나누는 삶'이 행복을 주는 것이다. 자원봉사자들은 우리사회에 보물과 같은 사람들이다.

1. 나눔의 실천

1) 서상돈 아우구스티노회장(1851-1913)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해진 해가 1784년, 처음으로 교구가 설정된 해가 1831년이었다. 하나의 교구가 서울과 대구 두 개로 분할된 해가 1911년이다.

대구교구의 초대교구장으로 임명된 분이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안세화주교였다. 안주교는 일제강점기의 열악한 환경에서 교구의 초석을 놓은 분이다.

당시 대구의 많은 신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분이 서상돈 아우구스티노 회장이다. 서회장은 원래 선대가 서울사람들이었는데 초대교회시기부터 천주교집안이었다. 박해를 피해 전국을 전전하다가 대구에 정착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 때 가족들이 대부분 순교하여 집안이 다시 풍비박산 나게 되었다.

서회장은 십대중반에 보부상을 따라다니면서 장사를 배웠다. 부산에서 배에 물건을 싣고 낙동강을 따라 안동까지 다니면서 장사를 했는데 30대 초반에 대상으로 성장하였고, 조정으로부터 경상도일대의 세금을 미리 국가에 납부하고 나중에 백성들에게 세금을 걷는 시찰관에 임명되었다. 서회장은 국가와 교회를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일제의 침략에 맞서 독립협회가 결성되었을 때 재무부장으로 활약하면서 독립군들의 군자금을 지원하였다.

1907년에는 대구 광문사에서 김광제와 함께 전 국민이 3달간 담배를 끊어 일본에 지고 있던 국채 1300만환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은 전국적인 운동으로 번져 상당한 성과를 낳았으나 일제의 반대로 결국 무산되었다.

서회장은 대구교구가 설립되자 대구남산동 일대의 땅 수만 평을 기증해서 오늘의 교구청, 신학교, 수녀원, 전 효성, 대건학교 부지가 되었고, 성직자, 수도자를 돕는데 헌신하였다.

순교자집안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척박한 환경을 이겨내고 성공하여 그 성공을 국가와 교회를 위해 나눈 서회장의 삶은 후손들에게 귀감을 주고 있다.

2) 경주 최부자 최진립(1568-1636)

우리나라에서 경주 최부자는 유명하다. 최그 시조가 최진립 어른이다. 부자는 3백년 이상 12대에 걸쳐 부자로 살았다는 것도 놀랍지만, 번 돈을 잘 쓸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을 지닌 부자로 유명했다. 부자가 3대를 넘기기 어렵다는데 12대까지 유지할 수 있었던 것과 사람들에게 어떤 손가락질도 받지 않은 것은 아마도 최부자 가문의 가훈 때문일 것이다.

- 과거는 보되 진사 이상을 하지 마라(재물과 권력을 함께 추구하면 망한다)

- 재산은 일만석 이상을 지니지 말라(과욕을 버려라)

-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나그네와 가난한 사람들을 후하게 대접하라)

- 흉년이 들었을 때는 땅을 사지마라(남의 눈에 피눈물을 내면서 재산을 모으지 마라)

-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있다고 티내지 말고 검소하게 사는 습관을 가져라)

-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사람은 더불어 살아야 한다)

최진립(1568-1636)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웠고, 병자호란 때 전사했다. 그의 아들은 큰 개울에 둑을 쌓아 농토를 조성하였다. 그 농토를 소작인들에게 주고 반반씩 나누는 병작제를 실시했는데 큰 호응을 얻었다. 당시 삼칠제가 보통이었다. 최부자 집에서는 중간관리인을 두지 않고 직접 소작인들의 고충을 들으며 일을 하였다. 조선시대 후기 많은 민란이 일어나고 양반집이 털렸을 때에서 최부자집은 어떤 피해도 입지 않았다. 평소에 나누고 베푸는 삶으로 존경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경주 최부자는 오랜 세월동안 가문의 좋은 정신과 재산을 잘 사용하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도왔고 오늘도 존경받고 있다.

3) 이시몬기부금

2. 성전건립과 나눔

성전건립과 같은 큰 일에도 기부금을 내는 분들이 많다. 평생 성당을 한 곳 지어 바치는 소망을 안고 살면서 실천하는 분들도 있다. 대구와 안동교구의 몇몇 본당을 예로 들어본다.

1) 신녕성당

2) 반야월성당

3) 안동교구 강구성당

4) 평리본당

5) 동명성당

6) 선산본당

3. 재물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가톨릭교회는 그동안 가난과 겸손을 강조하다보니 부와 재물이 나쁜 것으로 오해될 수 있었다. 우리 '재물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잘 알고 실천해야 하겠다.

성경의 근본적인 뜻은 사람이 주어진 능력대로 부지런히 일을 해서 돈을 벌고 부자가 되어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그래서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는 것은 성경의 뜻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가난의 정신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가난의 정신'으로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모든 재물의 마지막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나는 관리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둘째, 나눔의 정신이다.

4. 결론

신앙인은 내 혼자 잘먹고 잘살다가 이담에 천당에 가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내 혼자 기도 열심히 하고 성인되고 천당에 가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신앙인은 남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하겠다.

나만 생각하는 좀 이기적인 신앙이 아니라 남을 생각할 줄 아는 거룩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세상에 사는 동안 힘닿는 대로 부지런히 남을 위해서 베풀고 좋은 일을 하다가 이담에 하늘나라에 가야하겠다.

5. 마치는 이야기

지난 1년 동안 교회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했다.

나는 교회이야기를 통해 다음 세 가지를 전해드리고 싶었다.

1. 가톨릭을 알기 쉽고 재미있게

'가톨릭 교리는 너무 어려워요.'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나의 신학생시절 학장신부님은 지금도 나에게 큰 스승이시다. 학장신부님은 '사제는 자나깨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다'고 하시면서 복음을 전할 때 두 가지를 잊지 말라고 하셨다. : '첫째, 쉽게, 둘째, 재미있게 해라!'

법정스님(1932-2010)이 어느 날 해인사를 찾았다가 8만대장경이 보관된 장격각을 보고 내려오는 어느 아주머니에게 '팔만대장경을 잘 보았냐?'고 물었더니 아주머니가 '대장경이 뭐요?'라고 대답했다. '아니 저 위 건물 안에 있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아주머니가 '아 그 빨래판 같이 생긴거요?'라고 대답하는 데서 충격을 받았다. 스님은 '아무리 좋은 가르침이라도 어려운 글자로 남아 있으면 빨래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어떻게 하면 진리를 알기 쉽게 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무소유'를 비롯한 진리를 꿰뚫는 알기 쉬운 스님의 글들이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면서 속을 시원하게 해주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스님을 정신적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 일부 스님들은 '얄팍한 글재주로 민중을 현혹한다'고 비판했지만... 스님은 휘둘리지 않았다.

사제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다. 나도 '알기 쉽고 재미있게' 전하고 싶습니다. 거기에 할 수만 있다면 '명확하게'를 더하고 싶다.

2. 교회라는 울타리를 넘어 세상으로

'가톨릭은 너무 고리타분해요.'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나의 석사학위논문 주제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교회개념'이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가톨릭교회에 '과거로부터 미래'라는 전환점을 각성시킨 교회회의였다. 공의회의 가장 큰 소망이 '교회라는 울타리를 넘어 세상으로!'라는 말이었다. 공의회를 이끌었던 신학자 카알 라너신부는 '교회와 세상의 경계선을 긋지 마라'고 거듭 이야기했다. 교회가 세상에서 고립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공의회의 소망이 공의회문헌 곳곳에 녹아 있다. :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이다.' (사목헌장 1항)

더 이상 복음이 교회라는 울타리 속에서 고상한 이념으로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되겠다. 고고한 학처럼 교회의 종탑 위에만 머물면서 세상을 단죄하거나 못마땅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어서는 안되겠다. 세상으로의 행군을 주저해서는 안되겠다. 거친 세상... 매일매일 고단한 삶이 전쟁처럼 벌어지는 세상에서 지친사람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춤을 추어야 하겠다. '백성들이 춤을 추는 세상'을 간절히 원했던 조선의 개혁가 조광조(1482-1519)의 추상같던 강직함이 떠오른다. 무능하고 혼탁한 조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이순신장군(1545-1598)의 혼이 그립다.

사제는 세상 안의 사람들에게 복을 빌어주는 사람이다. 축복이 사제의 본업이다.

3. 인간에 대한 연민

'가톨릭의 가르침은 너무 무거워요.'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절에 가면 부처님의 얼굴은 언제나 온화한 모습어서 왠지 편안한데 성당에 가면 예수님의 얼굴은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이어서 마음이 움츠러든다는 말을 듣는다. 고단한 인생이라고들 한다.

막부시대를 연 일본의 장군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1616)는 참는 데 달인이었다. 그의 인생관에는 인내가 녹아 있다: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결코 서두르지 말지어다.

부자유를 일상사로 여기면 그리 부족한 것이 없는 법,

마음의 욕망이 일어나거든 곤궁했을 때를 생각하라.

참고 견딤은 무사장구의 근원이요,

이기는 것만 알고 지는 것을 알지 못하면 반드시 그 해가 몸에 미치리니

항상 자신을 책하고 남을 책하지 말지어다.'

그동안 가톨릭은 죄와 죄의식을 많이 강조해왔다.

하느님도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보다는 정의와 심판의 하느님을 강조함으로써 무서운 하느님을 각인시켰다. 그래서 '하느님' 하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얼른 달려가고 싶은 아버지가 아니라 '무섭다'는 느낌이 먼저 들고 괜히 오그라들기 일쑤였다.

또 강론이나 강의 때면 늘 '수난과 고통, 십자가와 희생, 죽음'과 같은 주제를 강조하고 끊임없이 죄와 죄의식을 일깨우다보니 신앙생활이 무겁고 무섭고 주눅 들기 쉬웠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은 '정의의 하느님인 동시에 자비의 하느님'이시다.

교회는 그동안 정의의 하느님을 더욱 부각시킴으로써 사람들을 죄와 죄의식 앞에 기도 못 펴고 살게 해온 것 같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죄와 죄의식에 짓눌려 살기를 원치 않으시는 분일 것이다. 오히려 인간의 나약한 인간성을 딱하게 여기고 어루만져 주실 분이시다.

하느님은 우리의 애처로운 인간성, 카알 라너신부의 표현대로 '비참하고 비겁하고 원시적인 인간성'을 알고 계시고 우리를 안쓰럽게 지켜봐주시는 분, 우리의 애처로운 인간성을 깊이 연민하시는 분이실 것이다. 우리가 수없이 실패하고 또 실패하더라도 끝까지, 죽는 그 순간까지 우리의 애처로운 인간성을 안쓰러워하시고 기다려주시고 연민하시는 분이실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은 '애처로운 인간성을 연민(憐憫)하시는 하느님'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나약한 인간성의 굴레를 피할 수는 없겠지만 하느님 연민의 신비에 모든 것을 겸손되이 맡기고 용기와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인간은 하느님 없이 살 수 있을지 몰라도 하느님은 인간 없이는 못사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제는 무섭고 심판하시는 하느님보다는 따뜻하고 자비로우신 아버지의 모습을 더욱 강조하고 싶다. 용서하시는 아버지, 사랑하시는 아버지, 우리를 축복해주시고,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아버지, 언제나 우리를 따뜻하게 안아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더욱 강조하고 싶다.

그리하여 고단한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굳게 믿고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다가 마침내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

사제는 인생의 동반자다. 고단한 인생에 행복을 일깨워주는 동반자다.

1년 동안 교회이야기를 시청해주신 시청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평화방송 제작진 여러분께도 감사드린다.

무엇보다도 1년 동안 방청석을 채워주신 여기 계신 방청객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린다.

독일말 감사라는 말에는 '하느님께서 갚아주시기를'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여러분의 수고를 하느님께서 갚아주시기를 기도드린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