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두산 순교특강 피어라 순교자의 꽃들아

제13강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시복 시성

재생 시간 : 00:00|2015-12-18|VIEW : 4,928

1.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 1) 자료 조사  ① 뮈텔 신부의 자료 조사 - 기해 및 병오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 조사가 1876년에 재개될 때에 함께 시작 - 특히 1880년 뮈텔 신부가 입국하면서 활기를 띠게 되어, 1884년부터 본격적인 자료 및 예비조사 작업 시작 - 1885년 뮈텔 신부가 프랑스로 귀국하면서 잠시 중단되었다...

1.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

1) 자료 조사

 ① 뮈텔 신부의 자료 조사

- 기해 및 병오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 조사가 1876년에 재개될 때에 함께 시작

- 특히 1880년 뮈텔 신부가 입국하면서 활기를 띠게 되어, 1884년부터 본격적인 자료 및 예비조사 작업 시작

- 1885년 뮈텔 신부가 프랑스로 귀국하면서 잠시 중단되었다.

- 1890년 뮈텔 신부가 조선대목구장으로 다시 입국하면서 병인박해 순교자 조사 작업도 다시 재개되었다.

 

② 㰡”치명일긔㰡•의 간행

- 1895년 르 장드르 신부에 의해서 조사, 정리된 병인박해 순교자 877명의 전기가 㰡”치명일긔㰡•로 간행됨으로써 조사 수속이 시작되었다.

- 뮈텔 주교는 㰡”치명일긔㰡•가 간행되자 이를 전국의 본당에 배포하여 보완 증거와 누락된 순교자들에 대한 전기를 추가로 수집하였다.

 

2) 시복 심사

 ① 교구에서의 절차 = 조사 수속 = 예비 심사

- 병인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조사 수속은 교구 재판의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 뮈텔 주교는 1899년 르장드르 신부를 위임 판사에, 한기근 신부를 시복 조사 청원자에, 그리고 홍병철 신부를 서기로 임명하여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 1899년 6월 19일부터 증인이 거주하는 지역별로 재판을 시작: 오전 9시 종현 성당에서 뮈텔 주교가 임석한 가운데 시복 재판을 개정하였다.

- 1900년 11월 30일 오후 2시에 제135차 재판을 개최하여 마리아 라리베에르 수녀의 증언을 청취함으로써 100명의 증인을 대상으로 한 재판을 마무리하였다.

- 1901년 3월 30일 위임 판사 르장드르 신부는 교구 수속에 해당하는 조사 내용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최종 보고서를 작성한 다음에 이를 뮈텔 주교에게 제출하였다.

- 1901년 4월 22일 오후 2시에 열린 제136차 시복 재판에서 뮈텔 주교와 르장드르 위임 판사 외에 무세, 홍병철, 데예, 주아요, 한기근, 마라발, 라크루 등 7명의 신부가 참석한 가운데 최종적으로 시복 법정의 폐정을 선언하였다.

- 증언 청취를 위한 시복 재판과 병행하여 증언 내용을 라틴어로 옮기고 또 그 정확성을 기하기 위하여 원문과 대조하는 회의를 1900년 11월 5일부터 1901년 4월 25일까지 56회에 걸쳐 열어서 라틴어 번역문을 확정하였다.

- 이렇게 하여 작성된 병인박해 순교자 29위의 㰡”병인 순교자 시복조사 수속록㰡• 전 10책이 예부성성에 제출되었다.

* 의문: 병인박해 순교자는 아무리 적게 보아도 수천 명인데 왜 29명만을 시복 후보자로 올렸을까? -> 뮈텔 주교와 당시 선교사들의 매우 엄격한 신앙 기준이 적용된 것일까?

- 예부성성은 수속록을 검토한 뒤, 1914년 5월 13일 이를 승인

- 1918년 11월 13일 교황 베네딕도 15세가 시복 안건의 개시를 허락하면서 허락서와 지침서를 내렸다.

- 이때 시복 청원 대상자 29위 가운데 증거불충분으로 이성천(베드로), 이성욱(필립보 또는 베도로), 송성보(아우구스티노) 3위가 탈락하고 26위가 시복 심사의 대상자로 확정되었다.

- 이 때 교황청에서는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시복 안건을 코친차이나 순교자들의 시복 안건과 한데 묶어서 추진하였다.

- 병인 순교자 심사의 특징:

㉠ 79위의 경우는 다만 문헌의 신빙성에 의거하여 시복수속을 접수하였다.

㉡ 29위의 경우는 철저한 재판형식을 거친 87명의 증언을 토대로 시복절차가 접수됨

 

② 교황청 수속: 서울대목구에 위임됨

- 1919년 7월 29일 예부성성은 교황청 수속을 위한 교회 재판을 서울대목구에 위임

- 뮈텔 주교는 1년 반 정도의 준비 기간을 거친 뒤에 1921년 1월 17일에 드브레 주교를 시복 판사로 임명

- 드브레 주교는 1921년 2월 12일에 시복 재판을 개정하여, 1925년 10월 6일까지 94회에 걸쳐서 85명의 증인을 대상으로 병인박해 순교자 26위에 대한 증언을 청취하였다. 서울을 비롯하여 풍수원, 용소막, 금사리, 공주, 서산, 합덕, 대구 등 전국을 순회하면서 시복 재판을 열었다.

-1925년 12월 28일 서울의 주교관에서 속개된 제95차 회의에서는 지금까지 청취한 증언과 수집한 문서들의 라틴어 번역이 완성되었음을 선언하였다.

-1925년 12월 30일에 열린 제96차 회의부터 1926년 3월 13일의 제128차 회의까지 총 33회에 걸쳐서 시복 재판 내용과 관련 문서들의 라틴어 번역문에 대한 의견을 청취하고 원문과 대조하는 회의를 열었다.


-1926년 3월 18일의 제129차 회의에서 뮈텔 주교는 서울 대목구가 교황청으로부터 위임을 받아 진행한 교황청 시복 수속의 시복 재판정을 폐정한다고 선언하였다.

지금까지의 재판 기록 원본은 밀봉하여 서울 대목구의 문서 보관소에 안전하게 보관했다가 홍콩에 있는 포교성성 대표부의 문서 보관소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사본 한 부는 뮈텔 주교가 직접 서명하고 봉인하여 적당한 시기에 로마로 보내기로 하였다.

- 드브레 주교는 그 동안의 자료를 정리하여 㰡”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㰡•(현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을 완성하였고, 1925년에는 그 밖의 추가 증언 자료들을 모아 㰡”병인박해 치명사적㰡•(현 절두산 기념관 소장)으로 정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