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서기 연습 위해 토큰 들고 명동거리 나선 소박·단순한 성품.’
‘배고픈 행려자 무단 침입하자, 비서신부 통해 돈 쥐어 돌려보내.’
‘철거민과 가난한 이들 다녀간 후에는 “내가 은행이면 좋겠네….”’
신문 사회면 미담 제목 같은 이 글귀는 ‘추기경 김수환’ 뒤에 가려진 ‘인간 김수환’의 소박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소박한 사람, 평범한 사람, 어쩌면 바보처럼 개인의 이득을 취하지 못한 ‘인간 김수환’의 이야
기를 먼저 살펴볼까합니다.
토큰 든 추기경과 미행하는 수녀
김수환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 은퇴를 앞두고 있을 때였습니다.
김 추기경은 비서 수녀에게 뜬금없이 “버스 토큰 좀 사다 달라”고 부탁했죠. 이유를 묻자 “나도 이제 홀로서기 연습을 해야지”라고 답이 돌아왔습니다.
김 추기경은 며칠 뒤 “혼자 다녀올 데가 있다”며 토큰을 챙겨 회색 바지와 점퍼 차림으로 명동거리로 나갔습니다.
그 시절 대한민국에 김 추기경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 사람들 시선을 피하기 위해 모자를 눌러 써야했죠. 추기경이 대중교통을 이용해 본 적이 없는 터라 비서 수녀는 걱정스러워 몰래 그 뒤를 밟았습니다.
지금도 모자와 마스크를 써도 유명인들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죠. 마찬가지로 인파 속에서 추기경과 스친 행인들이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물론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들도 간간이 있었죠.
변장에도, 미행에도 익숙하지 않은 두 사람이었죠.
비서 수녀의 미행(?)을 눈치 챈 추기경은 돌아서서 “수녀가 졸졸 따라오니까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잖아”라며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추기경은 을지로 롯데백화점 앞에서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비서 수녀가 따라 타려고 하자 “집에 잘 찾아 들어 갈 테니까 걱정마라”며 끝내 돌려보냈습니다.
추기경의 외출은 오후 늦게서야 끝났습니다. 행선지조차 몰라 하루종일 애태운 비서 수녀에게 “나 잘 다녀왔지?”라며 으쓱 뽐내면서 말이죠. 이날 추기경이 어디를 다녀오셨나고요? 추기경은 한 신부의 노모(老母)를 찾아뵙고 왔습니다.
작은 차 큰 기쁨.
1991년 출시된 대우차 티코의 슬로건이죠.
김 추기경이 1990년대 중반 경차 티코를 타고 가는 모습이 언론에 노출된 적이 있습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추기경은 자신을 방문한 국제가톨릭형제회(AFI) 회원들과 어디를 가려고 교구청 현관으로 나왔습니다. 계획에 없던 외출이었고 운전기사가 쉬는 날이라 차편이 없었죠.
비서실에서 운전기사를 급히 호출하려고 하자 추기경은 “요한(김형태 운전기사)도 휴일에는 쉬어야지”라며 마당에 주차돼 있는 티코를 가리켰습니다. AFI 회원들이 타고 온 차였죠.
‘추기경님 이야기’라는 제목의 신문광고는 티코를 타는 추기경의 모습을 그린 만화로 구성됐습니다. 성직자를 광고에 등장시켜 상업화를 꾀했다는 비난에 결국 한 달을 채우지 못하고 중단됐습니다.
도둑이 와도 훔쳐갈 게 없는 방
부자인데 가난할 수 있을까요? 서울대교구장 김수환은 ‘부자’(교구법인의 모든 재산은 교구장 명의로 돼있다)였으나, 인간 김수환은 가난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은 늘 가난한 이들에게 가 있었습니다.
추기경이 밤늦게 혜화동 숙소에서 묵주기도를 하고 있을 때 행려자가 무단 침입한 적이 있습니다. 행려자는 “배가 고파서 왔으니 돈을 달라”고 사정했죠.
하지만 추기경은 지갑은 물론 방에 1만 원 짜리 한 장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난 수중에 돈이 없다. 응접실에 가서 기다리면 비서 신부한테 갖고 내려가라고 하겠다”며 내려 보냈습니다. 결국 비서 신부가 돈을 조금 쥐어줘 돌려보냈습니다.
이튿날 주교관 수위실과 비서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현관에 번호인식 자동키를 설치했습니다. 하지만 추기경은 “무슨 일이 있겠느냐? 내가 시달려도 좋으니 자동키를 떼라”며 역정을 냈죠. 하지만 비서실에서는 그 말에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가난했기에, 불편함 없는 삶
물론 성무활동에 쓰라며 추기경에게 돈 봉투를 내미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예방객들이 선물도 많이 들고 왔죠.
하지만 그 돈과 선물은 대부분 AIDS 환자공동체ㆍ외국인노동자공동체ㆍ출소자공동체 등에 미사를 주례하러 갈 때 들고 갔습니다.
비서실에 문의해 통장에 돈이 있으면 “내가 그 돈을 갖고 뭐하겠느냐?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쓰라”고 재촉했죠.
자신을 위해서는 돈을 쓸 줄을 몰랐습니다. 사실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방식이라 쓸 데도 없습니다.
또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초대와 호화로운 식사 초대가 겹칠 경우 항상 전자를 택했습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마음 씀씀이는 타고난 성격이었습니다.
한 측근은 “부와 명예를 가진 사람들도 추기경을 만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추기경이 진정 기쁘게 만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추기경은 식사준비ㆍ세탁물 정리ㆍ서류 정리 같은 일상적인 것들을 대부분 비서나 식복사 등 주위 도움으로 해결했습니다. 그런데도 “뭐를 어떻게 해달라”는 요청이나 “뭐를 왜 이렇게 해놓았냐”는 불평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게 주위 사람들 말입니다.
한 측근은 “인간이라면 불편한 게 없을 수 있겠느냐”며 “하지만 너무나 주장이 없으셔서 한 번은 백화점에 모시고 가서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보라고 말씀드릴까 생각도 해봤다”고 말했습니다.
남모르는 고뇌의 순간 많아
하지만 걸어다니는 미담 제조기인 ‘인간 김수환’은 외로웠습니다.
어머니 다음으로 혈육의 정이 깊었던 친형 김동한 신부의 부음(1983년 선종)을 로마에서 들었을 때 “머리와 가슴이 텅비고 가슴이 푹 파이는 것 같았다”고 회고한 바 있습니다.
추기경은 한 달 뒤 로마 회의를 마치고 귀국한 날, 대구로 내려가 혈육의 체취가 남아 있는 텅 빈 형님 방에서 홀로 잠을 잤다고 합니다.
또 잔정이 많았지만 친척들에게는 너무 한다 싶을 정도로 엄격했습니다. 교구장 시절에는 친척들이 찾아오는 것을 아예 막았습니다. 취직자리를 부탁하러 온 친척을 쌀쌀맞게 돌려보낸 적도 있습니다. 공과 사를 구분하느라 그런 것이었죠.
추기경은 홀로 감당하기 힘든 십자가 무게 때문에 더욱 외로웠습니다.
민주화운동으로 명동성당이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던 1970~80년대, 추기경은 집무실에서 누구와 언짢은 이야기나 가슴 아픈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늘 3층 성당으로 뚜벅뚜벅 걸어 올라갔습니다.
오른손으로 이마를 받치고 홀로 십자가 앞에 앉아 있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린 주위 사람들이 꽤 많다고 합니다.
추기경은 간혹 “다들 나한테 와서 어렵고 힘든 얘기를 털어놓으며 도와달라고 하는데 난 누구와 상의해야 하나?”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추기경이 도움을 청하거나 상의할 상대는 하느님 밖에 없었죠.
철거민이나 소규모 복지시설 책임자 등 경제적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이 다녀간 뒤에는 “내가 은행이라면 좋겠다”는 말을 했습니다.
진짜 바보
인간 김수환은 ‘우리 사회의 정신적 지주’와 ‘한국 천주교 수장(首將)’이라는 명예가 무색할 정도로 겸손했습니다.
추기경은 교구장직에서 물러난 뒤부터 견진성사 등 공식석상에 나갈 때 수단에 붉은 띠를 매지 않고 접어 갖고 다녔습니다.
주위 사람들도 이 변화를 한참 뒤에야 눈치챘죠.
여름용 하얀 수단에 붉은 띠는 추기경 존재를 강렬하게 드러냅니다.
추기경은 “나는 지는 태양, 후임자는 떠오르는 태양”이라는 우스갯소리를 몇 번 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을 스스로 낮추려 끊임없이 노력한 것이죠.
북방선교 사제양성을 지원하는 옹기장학회가 추기경 기념사업 성격의 장학회이고, 옹기(甕器)가 추기경 아호라는 사실도 추기경이 선종하기 얼마 전인 2008년 8월에야 공개됐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죠. 그러나 추기경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아 그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2008년 초여름, 가톨릭평화신문 기자가 추기경과 인터뷰를 할 때 “김수환은 □□이다”에 들어갈 만한 적당한 단어를 찾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추기경은 “김수환은 바보다”라고 즉답했습니다.
의외의 대답이었죠. 그 이유를 묻자 “하느님은 위대하시고 사랑과 진실 그 자체인 것을 잘 알면서도 마음 깊이 깨닫지 못하고 사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추기경은 그 뒤 ‘바보야’라는 제목으로 자화상까지 그렸습니다.
물론, 추기경은 어리석고 못난 바보가 아닙니다.
군사독재 정권의 압력에 맞서 민주와 정의를, 물질만능시대에 맞서 사랑과 인간애를 외친 진짜 바보였습니다.
가난한 옹기장수 집에 막내아들로 태어난 그는 또 옹기처럼 질박한 삶으로 화려한 것이 넘쳐나는 세상을 거스르고, 순수한 웃음으로 거짓과 탐욕을 중화(中和)시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