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들이 김수환 추기경에게 이런 질문을 자주 했습니다.
“성직자로 살아오시는 동안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였나요?”
추기경의 대답은 항상 같았습니다.
“가난한 신자들과 울고 웃었던 본당신부 시절이 제일 행복했어요.”
본당신부 시절이 제일 행복
1951년 사제품을 받고 성직의 길에 들어선 김 추기경은 본당신부 생활이라고 해봐야 안동본당(현 목성동본당)과 김천본당(현 김천 황금본당)을 합해 고작 2년 반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 짧은 추억을 소중하게 품고 한 평생을 살았습니다.
신자들과 동고동락하는 행복은 고위 성직자가 되는 순간부터 그에게서 멀어졌습니다. 1966년 초대 마산교구장으로 임명돼 사목 일선을 떠나야 했죠. 그는 마산교구장 시절에 “시골본당으로 사목방문 나갈 때가 가장 즐겁다”는 말로 아쉬움을 내비치곤 했습니다.
마산교구에서 나름대로 신설교구 기초를 닦느라 분주했지만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습니다. 사목계획을 펼치기도 전에, 그러니까 정확히 2년 만에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됐기 때문입니다.
당시 성직의 길에 들어선 지 17년밖에 안 된 데다 서울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시골 주교가 서울대교구장이 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이 때문에 교구 일각에서 당혹스러워하는 분위기가 역력했습니다. 그는 교회와 사회를 위해 자신을 온전히 바치겠다는 각오를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라는 사목표어에 담아 드러냈습니다.
당시 서울대교구는 부채가 많고 사제들이 분열되는 등 복잡하게 얽힌 현안이 많았죠. 이 때문에 채권자들에게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사정하면서 교구를 추스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9년 한국 교회 최초의 추기경이자 당시 전 세계 추기경들 가운데 가장 나이 어린 추기경이었습니다.
바오로 6세 교황의 필리핀 방문 기간에 한국 주교회의 의장 자격으로 그곳에 가서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기구 창설을 주도한 점은 특기할 만합니다.
아시아 주교들은 교황 방문에 맞춰 처음 8일간 회의를 가졌는데 추기경은 그 자리에서 “이런 회의기구를 정식으로 만들자”고 발의해 압도적 지지를 이끌어냈습니다. 그 회의기구가 아시아 교회들의 교류협력을 촉진하고, 아시아교회를 대변하는 현 아시아 주교회의연합회(FABC)입니다.
1980년대는 한국 교회 교세의 급팽창기였습니다. 이때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대회(1981년), 한국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 신앙대회와 103위 시성식(1984년),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1989년) 등 굵직한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러 한국 가톨릭을 대내외에 알린 주역이 김 추기경입니다. 그가 1969년 추기경에 서임될 당시 2.5%에 머물던 한국 천주교 신자비율은 1998년 서울대교구장 퇴임시 8%를 넘어섰습니다.
사람들은 100만 인파가 여의도 광장에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찬 가운데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주례로 거행된 200주년 기념행사를 한국 교회 역사상 가장 가슴 벅찬 순간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사실 103위 시성식은 지금도 ‘기적’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추진과정이 힘들었습니다. 특히, 시성추진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기적심사는 매우 까다로운 문제였습니다. 시성 대상자의 기도나 행위 등으로 기적이 있었음을 증명해야 하는데 박해시대 순교자들 행적에서 그 점을 무슨 수로 찾아내 증명할 수 있었을까요? 더구나 로마 밖에서 시성식을 거행하는 것도 극히 드문 일이었습니다.
추기경의 청원서 한 통이 교황과 바티칸 당국자들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신앙을 증거한 신앙 선조들 사이에서 왜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겠습니까. 다만 그것을 증명하지 못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순교자들로 인한 기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100년에 걸친 박해 잿더미에서 교회가 다시 일어서고, 복음이 퍼져나가 한 해 영세자가 10만 명에 달하는 게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서울 세계성체대회는 젊고 활기찬 한국 교회를 전 세계에 알리는 데 큰 몫을 한 국제행사입니다.
추기경은 성체대회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한마음한몸운동을 태동시켰는데 이는 한국 교회가 ‘나누는 교회’로 전환하는 시발점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한마음한몸운동본부가 그동안 하느님의 이름으로 국내외에 전달한 지원금은 약 120억 원에 달합니다. 두 행사는 국내 선교활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추기경은 1990년대 들어 정치, 사회적 여건이 안정되자 교구 내실화에 부쩍 관심을 쏟았습니다. 양적성장 시대에서 질적 성장 시대로 넘어가기 위해 도입한 것이 소공동체 운동이죠. 추기경은 1992년 사목교서에서 ‘2000년대 복음화와 소공동체’를 장기 사목목표로 제시하고 소공동체 운동을 제창했는데, 이는 오랫동안 구상한 친교와 쇄신운동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992년 당시 서울대교구 본당들의 평균 신자 수는 7000명에 달했습니다.
추기경은 교세 급성장에 따라 사목현장에서 나타나는 문제점, 즉 교회 대형화ㆍ소속감 약화ㆍ쉬는신자 증가ㆍ삶과 신앙의 유리 등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소공동체라는 통찰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서울대교구에서 시작한 소공동체운동은 몇 년 만에 타교구로 확산돼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청소년 사목에 각별한 애정을 쏟은 점도 주목할만합니다. 추기경은 거의 매년 교적 청소년(청년) 신자 수와 주일학교 등록 신자 수를 비교한 수치를 제시하며 사목 강화를 독려했습니다. 추기경은 교구 예산 편성 시 “청소년은 교회의 미래가 아니라 현재다. 젊은이들을 잃어버리는 것은 널려 있는 보물을 잃어버리는 것이다”며 청소년 관련 지출만큼은 아끼지 않았다는 게 관계자들 전언입니다. 본당 사목방문 때도 빠뜨리지 않고 점검하는 게 청소년 사목활동이었습니다.
가톨릭 종합미디어 시대 개막
1988년 평화신문을 창간한 데 이어 평화방송 라디오(1990년)와 케이블 TV(1995년)를 잇달아 설립, 가톨릭 종합미디어 시대를 개막한 업적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 공동체 미사를 드릴 수 없을 당시 신자들에게 큰 위로가 된 TV 매일 미사 역시 추기경님의 선물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추기경은 TV 방송국 설립 논의가 오갈 때 고민이 깊었습니다. 엄청난 초기 투자비 때문이죠. 의견은 무성했지만 어차피 교구장이 결단을 내려야 할 사안이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21세기는 영상시대다. 매스미디어를 복음선교에 활용하는 것은 우리의 권리이자 의무”라고 천명하고 방송국 개국을 진두지휘했습니다.
그는 서울대교구장 이임 직후 “내 스스로 교구장직 30년을 점수 매긴다면 60점 이상 매길 자신이 없다. 그러나 시계바늘을 30년 전으로 되돌려 다시 한다고 해도 더 이상 잘할 자신이 없다”며 최선을 다해 직책을 수행했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는 또 “내 나름대로는 십자가를 지고 걷는 심정으로 살아왔다. 힘들고 지쳐서 그 십자가를 내려놓고 싶을 때도 많았다”는 말로 외롭고 고단했던 심정을 내비치기도 했습니다.
스스로에 대해 엄격했던 김 추기경이 짊어진 십자가는 무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