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80년대 군사 독재정권에 맞서 싸운 선봉장
가톨릭교회는 1970~80년대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싸웠습니다. 민주화운동의 구심점이자 사회정의의 보루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의든 타의든 당시 서울대교구장이었던 김수환 추기경은 그 한가운데서 민주화의 선봉장 역할을 했습니다.
추기경은 1967년 가톨릭노동청년회(지오쎄로 많이 부릅니다. JOC) 총재주교 자격으로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에 개입합니다.
그리하여 ‘사회정의와 노동자 인권옹호를 위한 주교단 공동교서’를 발표합니다. 이는 한국 교회의 첫 대사회적 발언으로 기록됩니다.
이 사건은 향후 1970~80년대 가톨릭 민주화운동의 시발점이 됐다는 점에서 상징적 의미가 큽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박정희 정권과 팽팽하게 대치합니다.
때론 유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힘없는 이들의 권리를 지켜줬습니다.
당시에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유신정권을 견제할만한 세력이 전무하다시피 했습니다. 그래서 김 추기경의 용기 있는 발언은 국민에게 ‘가뭄 속 단비’처럼 느껴졌습니다.
언론조차 침묵하고 있던 1971년, 추기경은 전국에 TV로 생중계되던 명동대성당 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독주를 비판했습니다.
급기야 생방송은 중단됐고, 방송을 시청하던 박정희 대통령은 불같이 화를 내며 방송중지 명령을 내린 사건은 유명한 일화로 국민들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시국사건 개입에 이념논쟁도
추기경의 이러한 예언자적 행동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과 독일 유학시절 탐구한 ‘그리스도 사회학’의 영향입니다.
제2의 성령강림으로도 불리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는 “이 시대 인간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는 그리스도인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번뇌”라고 선언했습니다. 이는 「현대 세계의 사목헌장」에서 언급돼 있습니다.
공의회는 특히 정의와 인권증진에 앞장설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또 필요하다면 정치질서에 대해서도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김 추기경은 로마에서 열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소식을 독일에서 시시각각 접한 덕분에 어느 누구보다 공의회가 추구하는 변화와 쇄신을 빨리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추기경은 독일 신부들과 공의회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면서 그 정신을 받았들였으며, 또 ‘그리스도 사회학’은 그에게 그리스도 사상에 기초한 인간관과 국가관을 심어줬습니다.
추기경은 생전에 “내 생각을 지배하는 가장 큰 주제는 하느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이라며 “이런 신념은 1970~80년대 험난한 시기에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마다 절대적 기준으로 작용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역사 가운데 1970년대는 특히 고난의 시기였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1974년 지학순 주교 구속사건으로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가톨릭교회와 대립했습니다.
추기경은 양심을 굽히지 않는 지학순 주교를 옹호하면서 한편으로는 정부의 탄압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해야 하는 막중한 짐을 어깨에 지고 있었습니다.
고뇌 끝에 박 대통령과 독재해 지 주교의 석방을 이끌어내고 내친 김에 민청학련에 연루돼 사형선고를 받은 유인태, 이철, 이강철 등의 감형조치도 얻어냅니다.
이후 젊은 사제들이 결성한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각종 시국사건에 개입하자 교회는 이념논쟁에 휘말렸습니다. 주교단 사이에서 추기경이 사제단에 대한 찬반의견이 엇갈려 곤혹스런 입장에 처한 것은 물론이고, 교회 내 보수 세력의 비난까지도 감수해야 했지요.
일각에서는 사제단을 조종해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장본인으로 지목되기도 했습니다. 정부와의 갈등은 1970년대 후반에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사제의 연행과 시국기도회가 악순환처럼 반복되자 추기경은 “차라리 내가 감옥에 가는 게 낫겠다”고 하소연을 할 정도였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노동자와 농민 편에 서서 그들의 피맺힌 절규를 대변해주었습니다. 생존권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는 노동자들을 정부는 좌경용공세력으로 몰아 탄압하던 시절이었습니다.
1978년 인천 동일방직 여공들이 명동대성당에 찾아와 억울함을 호소하자 추기경은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그들을 도왔습니다. 이때부터 노동자들의 명동성당 들머리 시위는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습니다. 김 추기경은 1980년 ‘광주의 5월’을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으로 가슴에 묻고 살았습니다.
<김수환 추기경> 우리 안의 바보, 김수환 2부
“가장 마음 고통을 겪은 때가 그때인 것 같아요. 사태가 그대로 알려지지도 않고 구체적으로 뭘 더 대처해야만 좋을지도 말하자면 모르는 그런 상태,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은 해봤지만 그게 먹혀 들어가지도 않고 그리고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은 것 같고 그러니까…”
당시 그는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만나는 등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모두 허사였습니다.
혼자서라도 항의성명을 내려고 쓰고 찢기를 수차례. 끝내 내지 못했습니다.
성난 대학생들과 민주인사들을 자극하면 유혈사태가 서울로까지 확대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추기경은 생전 인터뷰에서 “그때 차라리 광주에 내려가 시민들과 피를 흘리며 싸웠더라면 이토록 괴롭지는 않을 것”이라고 회고했습니다.
5공화국 정권은 미디어를 동원해 연일 가톨릭 때리기에 나섰으나 추기경은 “교회로 피신한 이들을 숨겨준 원주교구 최기식 신부의 행동은 사제로서 정당했다”며 의연하게 맞섰습니다. 민주화운동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1987년 6월 항쟁에서 승리의 물꼬를 튼 김 추기경의 업적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습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4·3 호헌조치, 노태우씨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한 체육관 선거 등은 시민들 분노를 폭발시켰습니다.
대학생들이 6·10 규탄대회를 마치고 경찰에 밀려 명동대성당에 들어왔을 때 추기경은 경찰 진압을 저지하면서 시위대를 보호했습니다.
정부 고위 당국 경찰병력 투입을 통보하자 추기경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함세웅 신부 / 당시 서울대교구 홍보국장>
“김수환 추기경님이 아주 강하게 ‘안 된다. 다시 광주와 같은 비극이 성당에서 일어나면 안 된다. 여러분들 그렇게 결정하셨다면 좋다. 내가 가서 눕겠다. 나를 밟고 지나가라. 그럼 내 옆에 뒷자리에는 사제들이 또 있을 거다. 사제들을 밟아라. 그 뒤에는 수도자들이 있다. 수도자들 수녀님들을 밟고 지나가라. 그 뒤에 청년 신학생들이 있을 거다. 그렇게 하려면 해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명동대성당 앞 대치는 우리나라가 민주화의 길로 가느냐, 군사정권이 연장되느냐의 갈림길에서 벌인 마지막 기싸움과 같았습니다.
결국 정부는 학생들의 안전귀가를 보장하고 경찰병력을 해산시켰습니다.
이어 국민의 직선제 개헌요구를 수용한다는 6·29 선언이 발표됐습니다.
추기경은 훗날 인터뷰에서 1970~80년대 격동기를 헤쳐나온 소감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동안 진보니, 좌경이니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습니다. 정치적 의도나 목적을 두고 한 일은 더더욱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그래서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주려고 했을 따름입니다. 그것이 가난하고 병들고 죄지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사시다 목숨까지 십자가 제단에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기여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의 육화이자 시대적 요청에 따른 충실한 응답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