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약자들의 눈물 닦아준 추기경

“교회는 가난한 이들 눈물을 닦아 줘야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 지향엔 늘 ‘소외된 형제들’이 자리했습니다.

팍팍한 노동 현실과 마주한 노동자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삶을 지탱하고 있는 빈민들, 공업화 속에 소외된 농민들, 한때 잘못으로 영어의 몸이 된 재소자들, 굶주리는 북녘 형제들, 소외된 이주민들까지 김 추기경의 기도 목록에 모든 소외된 사람들이 포함됐습니다.

김 추기경은 가난한 이웃들과 똑같이 먹고 자며 살 수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래서 늘 입버릇처럼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 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사랑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사랑으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소외된 현장 어디든 찾아 위로

김 추기경은 본당 신부 시절부터 가난하고 소외된 현장이면 어디든 찾아갔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런 김 추기경의 신념에 날개를 달아줬습니다. ‘적응과 쇄신’으로 압축된 제2차바티칸공의회 정신은 ‘사회사목’ 활성화로 구체화됩니다.

강화도 심도직물 노동조합 사건은 노동자들에 대한 김 추기경의 관심을 압축해서 보여줍니다.

김 추기경이 마산교구장으로 재임하던 1967년 5월, 김 추기경은 제2대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총재로 취입합니다. 총재로 취임한 김 추기경은 이듬해 초까지 이어진 심도직물 노조사태에 연대를 표명하고 함께했습니다.

“억눌리고 고통받는 노동자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행하느라 스스로 십자가를 진 연약한 소녀들과 JOC 회원들에게 존경을 표할 뿐입니다. 여러분의 노력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교회 역사가 증명합니다.”

1968년 상반기, 김 추기경의 노력이 결실을 맺습니다. 노동조건 개선과 함께 노조원 전원이 복직된 것입니다. 이는 우리나라 사회정의 신장과 가톨릭 인권운동사에 큰 획을 긋는 계기로 작용합니다.

김 추기경의 노동자에 대한 사목적 관심은 1970~80년대 노동·빈민사목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집니다.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가 만들어진 것도 이때입니다. 서울 노동사목위는 1971년 3월 ‘도시산업사목연구회’에서 출발, 이듬해 10월 ‘도시산업사목위원회’로 이름을 바꿨고 1980년 6월 현재의 이름을 가지게 됩니다.

노동사목위는 지금까지 40년 넘게 적극적인 노동사목과 함께 현장 활동을 강화하며 한국교회 노동사목의 종가로 그 위상을 다져가고 있습니다.

노동사목은 필연적으로 빈민사목과 맞물립니다. 연이은 도시 재개발과 강제철거로 가난한 이들은 삶의 자리를 잃어갑니다. 이를 보다 못한 김 추기경은 1985년 3월 ‘천주교 도시빈민사목협의회’를 발족합니다. 화살표 빈민사목이 본격화된 것입니다.

서울대교구장 재임 막바지인 1995년 3월에도 빈민사도직 선교사 양성 프로그램인 ‘바울로 계획’을 실행하기도 했습니다. 김 추기경은 수시로 철거민들 집단 이주지를 찾아 철거민과 사목자들을 격려했습니다. 그가 약자들을 만나면 남긴 말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화살표

“잠시라도 가난한 사람들 속에 들어가 머문 시간은 행복했다.”

“산동네와 복지시설에 기쁜 마음으로 찾아가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내가 가서 가난한 사람들 손을 한 번이라도 더 잡아주면 큰 힘이 된다고 하기에 부지런히 현장을 찾아다녔다.”

“그들의 까칠한 손을 잡아줄 때 오히려 내 자신이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민족 화해와 일치’ 물줄기 이뤄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를 앞뒀던 1987년 11월 ‘한마음한몸운동’이 발의 됩니다. 1988년 본격적으로 닻을 올린 한마음한몸운동은 김 추기경의 사회사목 활동의 분기점을 이뤘습니다.

성가정입양원·환경사목위원회·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민족화해위원회·생명위원회 지금은 서로 독립된 사회사목기구가 됐지만 모두 한마음한몸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 몫으로 한 줌 쌀을 내어놓는 헌미헌금으로 기금을 모았고, 이 기금은 한마음한몸운동본부를 통해 아시아는 물론 아프리카, 남미까지 돕는데 사용됩니다.

이는 세계 교회 속에 한국 천주교회의 위상을 우뚝 세우는 계기가 됩니다.

오태순 신부는 한마음한몸운동에 대해 “한국천주교회가 최초로 나눔운동이라는 펀드를 만든 것”이라며 “김수환 추기경께서 한마음한몸운동을 적극 추진하심을써 겨레에 ‘사랑의 등불’이 되셨다”고 회고했습니다.

해방 50주년이던 1995년 3월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가 닻을 올립니다. 1997년 1월 독립한 서울 민족화해위는 김 추기경이 아니었으면 설립이 어려웠던 기구였습니다. 당시 홍수와 가뭄으로 굶주리는 북녘 형제들을 돕자는 제안에 교회 일각에서도 우려가 나옵니다.

“식량을 들고 북녘에 들어가면 총을 쏘지 않겠느냐?”

그만큼 사회분위기는 경직돼 있었습니다.

이에 김 추기경은 “방아쇠를 당기는 게 좀 약해지지 않겠느냐”고 답변하며 대북 식량지원을 결단했습니다. 화살표

당시만해도 한국천주교회는 ‘대북 선교’라는 차원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화해의 성사’인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북녘 형제들과 나눔을 실천합니다.

또 민족화해와 일치를 기도하며 남북이 하나 되기 위한 민족화해 교육에 동참합니다. 화살표 전국 각 교구도 속속 민족화해위원회를 신설, 민족 화해와 일치는 교회 사목의 큰 물줄기를 이루게 됩니다.

교도소에 갇힌 수인들과 사형수에 대한 김 추기경의 사랑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김 추기경은 서울대교구장 재임시절은 물론, 퇴임 후에도 서울구치소를 찾아 미사를 주례하고 견진성사를 베풀며 재소자들을 위로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이 선한 사람들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죄인들을 위해 오셨다.”(1997년 미사 강론 중)

김 추기경은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죄인이 되셨다”며 재소자들이 신앙 안에서 희망을 가져줄 것을 당부하곤 했습니다. 화살표

아울러 김 추기경은 사형제도폐지운동에도 적극 동참합니다.

당시 사형제도폐지 포스터에는 이런 글귀가 써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형수였습니다.”

성경의 말씀처럼 김 추기경은 착한 이웃이 되어 모든 이를 위해 살아간 한 삶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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