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의 후손, 조선의 첫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는 1821년 충남 당진 솔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집안은 이미 4대에 걸쳐 신앙을 이어온 열성적인 교우 집안이었습니다. 증조부 복자 김진후 비오는 해미 옥에서 순교했고, 훗날 아버지 성 김제준 이냐시오 또한 순교로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신앙이 핏줄처럼 이어진 것입니다.
어린 김대건은 모방 베드로 신부의 추천으로 15살의 나이에 두 동료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험난한 여정과 기해박해의 비보 속에서도 신학 공부를 이어간 끝에, 1845년 8월 17일 상해 부근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의 집전으로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조선교회 최초의 사제였습니다.
사제가 된 그는 곧바로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해로를 통해 조선에 돌아왔습니다. 서울 돌우물골에 거처를 두고 미나리골·무쇠막·서빙고를 오가며 성사를 집전했고, 용인 은이와 터골, 멀리 경기 이천까지 신자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그사이에도 선교사들에게 조선을 알리기 위해 「조선전도」를 그렸고, 여러 통의 서한을 남겼습니다. 그중 기해박해 순교자들에 관한 기록은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가장 이른 보고입니다.
이듬해 여름, 새로운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열기 위해 황해도 바닷길에 나섰습니다. 백령도 부근에서 중국 어선에 편지와 지도를 전한 뒤 돌아오던 길, 순위도에서 관군에 체포되었습니다. 서울로 압송되어 40여 차례 문초를 받았고,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만 25세의 나이로 참수되었습니다. 사제품을 받은 지 1년 1개월 만이었습니다. 옥중에서도 그는 흔들리는 신자들을 격려하는 편지를 남기며 복음을 전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동료 순교자들
김대건 신부는 홀로 순교하지 않았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그리고 그 전후의 박해 속에서 조선 땅에는 신앙을 지키다 목숨을 바친 103명의 순교자가 있었습니다. 그중 92명은 평신도였고, 열한 명은 성직자였습니다. 부부가 함께, 부모와 자녀가 함께, 형제자매가 함께 목숨을 내어놓은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가장 어린 순교자는 13세의 성 유대철 베드로였고, 가장 열정적인 평신도 지도자는 조선교구 설립의 길을 연 성 정하상 바오로였습니다.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는 박해가 거세지자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복음을 따라 스스로 자수하여 새남터에서 순교했습니다.
1984년 5월 6일,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 방문 중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이 103명을 함께 시성하셨습니다. 로마 밖에서 거행된 최초의 시성식이자,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 앞에 드린 가장 빛나는 증거였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이름 뒤에 붙은 "동료 순교자들"은 단순한 수식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조선의 가정과 마을에서, 글을 아는 이와 모르는 이 사이에서, 서양 선교사와 토착 신자 사이에서, 나이와 신분을 넘어 함께 피 흘린 이름들의 공동체입니다.
하느님께서 오래지 아니하여 나와 비교하여 더 착실한 목자를
상으로 주실 것이니, 부디 서러워 마십시오.
주요 연보
충남 당진 솔뫼 출생
마카오 유학 출발
교황으로 선출 — 455년 만의 비이탈리아계 교황
상해에서 사제 수품 — 조선교회 최초의 사제
라파엘호로 귀국, 제주 표착 후 상륙
새남터에서 25세의 나이로 순교
103위 한국 순교성인으로 시성
성 베드로 대성전 외벽에 성상 설치
Scroll